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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시간을 거슬러 찾은 상처와 순수의 기록

by 꾸준한 루디 2025. 5. 18.

1. 거꾸로 걷는 시간: 비극의 퍼즐을 맞추는 서사 구조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1999)은 시간을 역행하는 독특한 서사 구조를 통해 한 개인의 몰락과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교차시키며 깊은 울림을 전하는 영화입니다. 1999년부터 1979년까지 20년간의 시간을 거슬러 주인공 김영호의 인생을 해부하며, 그의 비극적 결말 뒤에 숨겨진 개인적·사회적 원인을 다층적으로 조명합니다. 과거와 현재가 맞물리는 서사, 상징적 소재, 역사적 배경이 유기적으로 결합해 관객에게 강렬한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는 1999년 김영호(김영철 분)의 충격적인 자살 시도로 시작됩니다. 친구들과의 재회 자리에서 황폐한 모습으로 등장한 그는 강물에 뛰어들며 생을 마감하려 합니다. 이 첫 장면은 관객에게 “왜 이 지점에 도달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이후 5개의 에피소드(1999년, 1987년, 1984년, 1980년, 1979년)를 거꾸로 탐구하는 방식으로 답을 찾아갑니다.  
 
각 시간대는 퍼즐 조각처럼 맞물리며 영호의 파멸을 설명합니다. 1987년에는 이혼 직전의 아내 순임(문소리 분)과의 마주침, 1984년 부패한 경찰로 변해가는 모습, 1980년 광주에서의 치명적 실수, 마지막으로 1979년 첫사랑에게 박하사탕을 건네는 순수한 청년 시절이 층층이 드러납니다. 역순 서사는 단순히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것을 넘어, 관객으로 하여금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라는 윤리적 성찰을 유도합니다. 특히 1980년 5월 광주 에피소드에서 군인으로 참여한 영호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은 그의 인생이 궤도를 벗어나는 결정적 순간으로, 국가 폭력이 개인의 양심을 짓밟는 과정을 생생히 포착합니다.  
 
이처럼 과거로 향하는 서사는 영호의 ‘죄’와 ‘벌’을 점진적으로 드러내며, 관객이 그의 고통에 공감하게 만드는 동시에 역사적 트라우마의 무게를 전달합니다.  
 
 

2. 박하사탕: 상실된 순수성의 상징과 메타포

 
영화의 제목이자 핵심 소재인 박하사탕은 순수함과 상실, 시간의 아이러니를 압축한 상징입니다. 1979년, 청년 영호가 첫사랑 순임에게 건네는 하얀 사탕은 미래에 대한 희망과 순결한 사랑을 의미합니다. “내 인생의 첫사랑이에요”라는 대사와 함께 선물된 사탕은 그가 세상의 잔혹함에도 순수함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담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박하사탕은 점차 변질됩니다. 1984년 경찰서에서 주머니에 남은 사탕은 이미 색이 바랜 채 쓴맛만을 남기고, 1999년 이혼 직전 순임과의 마지막 대면에서 영호가 사탕을 꺼냈다가 다시 넣는 제스처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을 함축합니다. 이처럼 일상적 사물이 서사의 중심 축으로 작용하며, 영호의 타락과 인간성 붕괴를 은유합니다.  
 
감독은 박하사탕을 통해 ‘시간의 역설’을 강조합니다. 영호가 과거로 돌아갈수록 관객은 그의 순수한 모습을 목격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점점 더 타락해가는 모순을 보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선한 의지가 역사와 사회의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그립니다.  
 
 

3. 광주의 그림자: 역사가 개인에게 남긴 상처  

 
<박하사탕>은 김영호의 개인사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직시합니다. 1980년 5월 광주 에피소드는 영화의 정점으로, 군부 독재의 폭력이 어떻게 한 개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는지 적나라게 보여줍니다. 민주화 운동 진압 과정에서 영호는 상부의 명령에 따라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게 되고, 우발적으로 소녀를 죽이는 참변을 겪습니다. 이 순간의 트라우마는 그에게 평생 짊어져야 할 죄책감이 되며, 이후 모든 인간관계의 균열과 자기파괴적 행동의 근원이 됩니다.  
 
감독은 카메라워크로 역사의 폭력성을 생생히 재현합니다. 흔들리는 핸드헬드 촬영, 군화 발자국 소리, 시위대의 비명이 교차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당시의 공포를 체험하게 합니다. 특히 영호가 죽은 소녀의 시신 앞에서 멈춰 선 채 얼어붙는 모습은 국가 폭력의 희생양이 된 개인의 고통을 집약합니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아직 완전히 치유하지 못한 역사적 상처를 환기시킵니다.  
 
 
<박하사탕>은 영호의 비극을 통해 “과거는 변경될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1979년 청년 영호가 기찻길 위에서 박하사탕을 입에 넣으며 웃는 모습은 순수함 그 자체입니다. 하지만 관객은 이미 그의 비극적 미래를 알고 있기에, 이 장면은 오히려 아름답고 처절한 아이러니로 다가옵니다.  
 
이창동 감독은 영화를 통해 역사의 거대한 서사 아래 파묻힌 개인의 아픔에 주목합니다. 군사 독재, 경제 위기, 사회적 부조리 같은 집단적 트라우마가 개인의 운명을 어떻게 좌우하는지, 또 그 속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훼손되는지를 날카롭게 묻습니다. 동시에 영호의 눈물과 절규는 상처받은 이들이 과거와 화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용서인지, 기억인지에 대한 고민을 남깁니다.  
 
<박하사탕>은 단순한 비극 서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의 단면을 응시하는 거울입니다. 관람 후 여운처럼 남는 것은 개인의 선택과 시대의 강제 사이에서 흔들리는 인간 존재에 대한 연민입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마주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개인의 윤리적 책임을 동시에 성찰하게 하는, 한국 영화사에 남을 걸작입니다.